그러니까 때는 약 1년 전.
리먼브러더스가 털썩 주저 앉았을 무렵의 일입니다.
저는 곧장 저희 유학생활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초유의 금융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줄줄이 터져 나올 후속타들은 원화의 가치를 급속히 하락 시킬 것이고, 더군다나 747 공약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 나지 못한 이명박-강만수 경제팀은 이를 빌미로 원화 환율을 더욱 하향 조종할 것이 자명했습니다. 세계의 돈은 세가지 아닙니까. 달러, 엔, 유로. 이들 돈들이 비싸야, 수출해서 벌어 먹는 대기업들의 이윤이 올라 갈 것이고, 그래야 어떻게든 국가는 경제지수로 변명거리를 만들 수 있을테니까요. 대통령 임기라는 그 짧은 기간 동안, 서민의 삶은 그들에게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슈퍼스트럭쳐의 견고성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고,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는 끝끝내 그들의 먹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니까 진작에 내가 생각했던대로 학위에만 집중해 초스피드로 학교를 마치고 한국이든 유럽이든 얼른 독립을 해야 한다는 내 주장을 수렴해 주지 않았던 내 삶의 관계자들에게 매우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 그렇게 하라고 겉으로는 인정해 주면서도, 일상의 매 순간 내게 요구되는 것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었고, 그래서 저는 결국 모든 것은 내 능력치로 귀결되어 버리고 마는 그런 슈퍼맨 컴플랙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해일이 저 멀리서 두툼하고 위협적인 파도로 몰려 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망이 진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슈퍼맨 컴플랙스는, 무릇 모든 자의식이 대부분 그러하듯 오히려 제가 저 스스로에게 부과한 짐이었습니다. 실상은, 저 못지 않은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부담감을 제 아내도 감당해야 했고, 이 생활을 유지하도록 돕느라 한국의 식구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그 부담을 분담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부 둘 다 공부하면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런 생활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 이곳 사람들은 잘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는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자.
그런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여력을 따져 보았을 때 해가 바뀌어 2009년 4월 쯤이 되면 이제 파산입니다. 결국 현지에서 생활비를 조달하지 못하면 저와 제 아내 둘 중 하나는 애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후퇴해야 하고 독일에 남은 한 사람에게만 올인해야 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었습니다. 그 짜여진 시나리오에 삶을 맡기고 그러는 와중에 최선을 다면서 살다 보면 또 어떻게 좋은 일이 있겠지라는 식이 바로 사는대로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패러다임을 바꿔서,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긴 했는데 이 시급한 상황에 무엇을 어찌해야 가열찬 변화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현재를 이해할 수 없을 때는 보통 답이 과거에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이곳 베를린 리포트에 줄줄이 연재했던 그 많은 이야기들이 그 실천의 결과물입니다.

2009년 여름이 오면 더이상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겠다.
정식 취직을 목표로 하게 되었습니다. 입사 가능한 회사가 한군데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아직 작고, 더군다나 지금과같은 상황에서 신입사원을, 그것도 외국인을 채용해 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회사가 저를 뽑아서 쓰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좀 거창하게 부풀려 이야기 하자면, 나로 하여금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한국 미학전공 미술평론가 강수미씨의 책을 읽다가 발견한 문구가 있습니다. "시스템 유발자"가 그것입니다. 이는 "시스템 종속자"와 대응되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 때 입사를 위해 갖춰야 할 내 자질이 말하자면 바로 그 "시스템 유발자"로서의 능력이었습니다.

울면 죽는다.
아주 그냥, 먼 훗날 다시 읽어 보면 무슨 성공한 사람의 몇 가지 사고방식 운운하는 책을 펴도 되겠꾼늬. 문제는 아이들입니다. 상황을 돌파해 나감과 동시에, 절대적으로 지켜 내야할 철칙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이 모든 불안과 공포를 아이들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하라.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울면 죽는다. 죄수복을 입고 총을 겨눈 군인에게 끌려 가면서도 먼발치에 숨어 자신을 바라 보는 아들을 위해, 이것이 다 군인놀이라는 표정으로 팔과 무릎을 척척 치켜 들며, 얼굴은 활짝 웃게 해서 아들쪽을 향하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명장면을 떠 올랐습니다.

그리고 똥누러 갔습니다.



[이 야동은 반응을 보고 추석연휴가 지나면 삭제할까 싶습니다. 그 전에 많이들 감상하시길...^^.

이것이 2008년 11월 어느 하루동안 제 머릿속에서 퍼버버벅 점멸해 갔던 수 많은 생각들 중 골자들 몇가지만 간추려 엮은 이야기입니다. 이후, 아침에 돈도 못 버는 곳으로 출근할 때 마다 늘 건너는 다리 위를 걸으며 머리랑 목 어깨를 건들건들 흐느적흐느적하면서, "어디 친씨. 긴장좀 풀지? 니 그라다가 얼어 죽겐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다녔다는 것 아닙니까. 그 덕에 지금도 혼자 길가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중얼 거릴 때가 있습니다.

이후 체감 평균수면시간은 아마 4시간 이었던 것 같습니다. 밤샘을 하고 들어 와 체력 0 상태에서 쓰러져 기절하지 않는 한 아이들이 아빠를 원하면 꼭 놀아 주었습니다. 침대에서 놀다가 아들이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깜빡 잠들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겨우 네 살 먹은 아들이 그 아기자기한 몸놀림으로 살살 기어 내려가 아빠 깰까봐 조용히 문을 열어 다시 사알짝 닫아 놓고 나갑니다. 돌아 누워 있으면 눈물이 (딱) 한 줄기 슬쩍 흘러 내릴 때도 있었습니다. 근데 슬퍼할 겨를도 없습니다. 얼른 좀 자야 되니까.

현재 대기상태에 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낚시 밑밥 던지듯 내 존재를 툭툭 알려 주다가 어떤 이때다! 싶은 순간을 포착해 딱히 신입사원 모집 의사도 없는 회사에다가 "당신들은 나와 함께 일할 수 밖에 없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으...미쳤지 정말.) 사실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것은 단순한 돈벌이 용 취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일들이랑 제 관심사가 거의 정확히 일치합니다. 평생 내 기술로 써먹고 싶은, 그래서 유학을 온, 그 기술을 더 발전시켜 학위를 따고자 하는, 바로 그 내용이 그 회사의 주력사업내용입니다. 회사 바깥에서 나처럼 그 기술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나만큼 도구를 잘 다루는 사람도 없고, 거기다가 이 기술을 어떻게 아시아에 전파할 수 있을지 나만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 주장에 진정성을 담는데 거의 1년 걸린 셈입니다. 준비하는 내내 싸워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을 슬쩍 밝혀 봅니다.

의긔~ 진짜 변기에 앉은 사진까지 올려 가면서 별의 별 소리 다 했습니다만, 이건 성공스토리가 아닙니다. 이후에 그냥 아무 말 없으면, 취직이 안됐겠거니 하시고 진짜 취직이 되면 음....... 운 좋은 사람 걸렸을 때 한 턱 쏘죠 뭐.

어떻습니까. 이정도면 추석특집 슈퍼 울트라 메가톤급 리얼 버라이어티 쌩 라이브 오픈 웹2.0 인생 단막극 한 편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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